박성원의가족모임

박성원의 고조부에 대해서 박연백 [朴淵伯]

psw-성원 2012. 9. 23. 18:44
var socialWidgetCfg = { prefix : "박연백", prefix_twitter : "#Daum100", link : location.href, source_id : "95" }; dic100.domReady(function(){daum.load("http://s1.daumcdn.net/img-contents/script/social/237/SocialShareWidgetIcon.min.js" );});

 

박연백 요약정보

태어난 때 1869. 8. 4
태어난 곳 경북 의성
죽은 때 1909
소속 국가 한국
소속 국가 부속정보 한말
직업 의병

 

1869. 8. 4 경북 의성~ 1909.

한말의 의병장.

을사조약 체결 후 경상북도 지역에서 의병활동을 벌였다. 본관은 밀양. 일명 연백(淵白). 자는 응구(應九), 호는 암재(巖齋). 아버지는 광호(光鎬)이다. 6세부터 30세까지 한문을 배웠다. 1905년(광무 9)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격문을 써서 의병을 모으고 공산(孔山)에서 의병을 일으켰다. 1906년 7월 죽창·나무막대기 등으로 무장해 일본군과 교전한 뒤 의성·의흥·영천·청송 등지에서는 야간기습·화공 등으로 일본군에 타격을 입혔다. 1907년 10월 영천 정관여(鄭寬汝) 의병과 합세해 경주 죽지면(竹持面)에서 일본군과 교전했으나, 이 전투에서 정관여가 전사하고 의병진은 큰 피해를 입었다. 그해 11월 25일 의성읍 사무소와 경찰관분견소를 습격했으며, 12월 23일 청송군 송정리에서 일본경찰과 교전했고, 25일에는 의성군 사곡면에서 일본 수비대와 접전하는 등 맹렬히 활동했다. 그러나 1908년(융희 2) 일본의 의병대토벌작전으로 항일투쟁이 어려워지자 의병을 해산하고, 1909년 11월 20일 자취를 감추었다. 1963년 건국훈장 국민장이 추서되었다.